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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People/New/3/06/20111019/41215629/1

 

[발굴인터뷰] “스티브잡스를 꿈꿨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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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의 PC용 소프트웨어 개발자 박현철 씨
●1980년대 국내최초 컴퓨터 스타, 대기업 제의 뿌리치고 독립군으로…
●"소프트웨어 전문가를 꿈꾸었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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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 박현철.

"서울 청계천 전자부품부속가게에서 '박현철'을 찾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교생으로 우리말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한 박현철(17세·서울북공고2년) 군은 전문가들도 하기 힘든 일을 해낸 것이다" [1983년 1월22일자 동아일보 '금주의 얼굴']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잡스의 사망과 후 폭풍으로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위기가 재조명 받고 있다. 최고의 하드웨어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만 빈약한 운영체제(OS) 및 소프트웨어 운용능력으로 하청업체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많던 국내 소프트웨어 인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수소문 끝에 국내 최초의 PC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찾아냈다.

1980년대 초반은 애플컴퓨터가 몰고 온 '개인용 컴퓨터(PC)' 충격으로 이른바 전 세계 실리콘밸리들이 기지개를 펴던 시기다. 한국에서도 애플호환 컴퓨터가 청계천 시장을 중심으로 애플 모방품이 활발하게 조립 제작되던 시절이었다.

놀랍게도 '한국판 실리콘밸리' 청계천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장본인은 1983년 당시 17살 서울북공고 전자과 학생이던 박현철(45) 씨다.

■ 국내 최초의 한글 워드프로세서…기성세대 충격
"박 군이 컴퓨터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중학 3년 때, 국민학교 입학 전부터 오디오등 전자제품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온 박 군은 납땜과 전자제품조립으로…컴퓨터는 이용하는 기술(소프트웨어)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베이직 파스칼 포트란 어셈블러 등 소프트웨어를 익혔고…그는 장래 소프트웨어 분야의 제1인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동아일보 1983년 1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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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2학년 시절의 박현철(왼쪽), 1983년 1월18일자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인 1983년 1월, 대한민국 언론은 10대 컴퓨터 천재를 주목했다. 당시 서울북공고 2학년생인 그는 개인용 컴퓨터(애플2 플러스)를 활용한 한글 최초의 워드프로세서를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가 컴퓨터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컴퓨터 수재로 이름을 알린 그는 1982년 삼보컴퓨터 회장인 이용태 박사의 허락을 받고 방과 후에 엘렉스 사무실에서 PC를 사용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독학한 어셈블리언어로 한줄 한줄 코딩을 해서 최초의 한글워드프로세서를 만들어 냈다. 이 소프트웨어는 초보적이었지만 한글 입력은 물론 프린터 출력이 가능해 충분히 타자기를 대신에 사무용으로 활용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당시 박 군의 소프트웨어는 컴퓨터를 구입하는 기업들이나 개인들에게는 가장 필수적인 소프트웨어로 인식됐다. 배포를 담당한 삼보컴퓨터 측은 "순식간에 2만 카피가 나갔다"는 통계를 내기도 했다.

또한 청계천에서는 박 군이 등장한 신문기사를 가게 앞에 붙여두며 호객 행위를 할 정도로 그는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된 것이다.

이런 큰일을 당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혼자 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기에 당시 정부는 훈장을 준다고 호들갑을 떨고 대기업들은 '해외 유학'이란 조건까지 내걸고 그를 스카우트하려고 경쟁까지 벌일 정도였다.

심지어 그를 모델로 삼은 '학생과 컴퓨터'라는 잡지가 창간되기도 했다. 미래 한국의 희망이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국내 최초의 워드르포세서를 개발한 그는 29년이 지난 현재 빚에 쪼들린 평범한 IT개발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대기업이 제안한 해외유학 기회를 마다한 그는 이후 조그만 IT업체에 취직한다. 배움이 갈급했던 그는 1987년 모 전문대를 졸업하고는 이후에도 줄곧 중소업체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활약했다.

1990년대에는 잠시 미국에서 활약하기도 했지만 이내 한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2000년대에는 한국에서 인터넷 사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빚을 지게 됐고, 이후에는 생업을 위해 자신의 개발능력을 활용해온 것이다. 10월18일 여의도 한 사무실 앞에서 그를 만났다.

■ 포스코에서 '해외유학' 내걸고 스카우트 제의…그러나 거절

-1983년 당시 언론의 관심이 지대했는데…이찬진 씨의 아래아 한글이 1989년이니까 무척 빠른 데뷔였다.

"사실 공짜였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국내 최초의 무상 소프트웨어였던 셈이다. 큰돈을 벌수도 있었겠지만 제 아버지는 학생은 돈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나 역시 컴퓨터에 대한 관심이 전부였다. 당시 주요 매체에서 소프트웨어 천재가 나타났다고 하니 (결국 받지는 못했지만) 정부에서는 훈장을 준다고 나섰고, 대기업에서는 해외유학을 전제로 취업 제의가 쏟아지기도 했다."

-당시 제작한 소프트웨어 이름이…?

"당시엔 소프트웨어에 이름을 짓는다는 것도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냥 알기 쉽게 '한글워드프로세서 버전 1.0'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버전(version)이란 말을 모르니 비전의 오타 아니냐고 묻기도 했을 정도다. 내가 처음 만들고 이후 대기업들의 워드프로세스가 만들어 졌고 1988년에야 이찬진 씨의 '아래아한글'이 상업용으로 출시됐다. 국내 최초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어째서 그 좋은 제안들을 모두 거절했나?

"당시 우리 부모님은 지방에서 농사짓는 분이어서 적절한 조언을 주는 분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포항제철 대한전선 등 큰 기업들에서 좋은 제안이 많이 왔는데, 어린 마음에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내가 자존심이 셌고 대기업들의 고압적인 자세를 보고 나와 맞지 않다고 느꼈다. 물론 만약 그 때 유학을 갔더라면 다른 인생이 펼쳐졌을 지도 모르겠다."

-이후의 삶의 궤적을 설명해 달라

"꾸준하게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의 삶을 살았다. 1980년대 한일한영 워드프로세서도 개발했고, 한양대 김정수 교수가 창안한 '한글기울어 풀어쓰기' 소프트웨어도 개발했다. 군대 다녀오고 1990년대에 '메아리'로 불리는 팩스모뎀 업체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미국에 갈 기회가 생겨 애틀랜타의 한 업체에서 윈도우용 팩스모뎀 소프트웨어 개발에 참여했다. 그리고 1999년 이후에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사업에 실패하고는 여러 곳의 개발 일에 참여 하고 있다. 초창기 소프트웨어 개발자 가운데서는 내가 가장 성공하지 못한 케이스다."

■ "한국의 소프트웨어 인재가 미래를 결정"

-인생을 돌이켜 보면 아쉬운 대목이 많을 텐데…

"물론이다. 나도 적절한 조력자를 만났다면 안철수 대표 정도는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웃음) 그러나 고지식한 개발자 마인드를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내 자식과 후배들에겐 찾아온 기회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다."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가장 안타까운 대목이란

"누가 뭐래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을 육성하고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하청에 재하청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게다가 대기업 SI(시스템통합)업체들이 개발자들을 돈으로 타락시킨 면이 큰 것 같다. 창의적인 개발자들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다. 나 역시 SI분야에서 일해본 적이 있는데 그냥 먹고살기 위한 일일 뿐이었다. 슬픈 일이다."

그런 그는 최신형 삼성 갤럭시S II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애플의 아이폰에 대해 비판하며 우리도 조금만 환경이 좋아지면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 만한 OS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애플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그의 의견 치고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국내 최초 애플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잡스의 죽음을 바라보는 소회가 있다면?

"개인적으론 동생이 췌장암으로 죽었기 때문에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IT산업 측면에서 바라보면 그의 존재는 '악(惡)'의 측면도 없지 않았다. 사실 국내에서 많은 진보적인 인사들이 잡스를 존경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1984년 매킨토시 이후의 잡스는 폐쇄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온 나쁜 존재다. 그가 현재 벌이는 특허 전쟁도 IT정신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팍스콘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압제적 경영자의 전형이다. 그런데도 한진중공업 김진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를 맹신하는 모습은 논리적이지 않다고 본다."

-후배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 역시도 젊은 시절에는 자신감에 차있었고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처럼 크게 성공하고 싶었다. 후배들은 개발자로서 자신을 너무 과신하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엔지니어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은 좋지만 좋은 커뮤니케이션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됐다. 그리고 자신의 영역에 한정되어 특정 기술에 매달리기 보다는 다양한 연관 기술을 꾸준하게 공부했으면 좋겠다. 특히 웹 개발 같은 트렌디한 기술 보다는 소프트웨어 본연의 기술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업만큼은 엔지니어 기준으로 안했으면 좋겠다. 보다 많은 재능 있는 후배들이 IT분야로 오기 위해서는 내가 성공했어야 하는데 사실 그 점이 미안하다."

그는 29년 전 어색한 양복을 입고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에서 인터뷰 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내년이 국내 첫 PC소프트웨어 30주년이 된다는 얘기에, "아, 그렇군요…내년에는 조촐한 기념식이라도 마련해보겠다"고 말하고 총총히 자신의 일터로 되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에서 초라한 한국의 소프트웨어 천재들의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보였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blog_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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